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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0 → 22,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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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신성(神性)을 탐색하다!“이 책은 이 세상의 한 시절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간 시인들이 꿈꾸고 만난 하나님, 어쩌면 낯설고 희한한 미지의 신과 그 신의 나라에 대한 신학자의 보고서다. 부디 이 땅의 메마르고 딱딱한 신학과 목회의 현장에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으로 성육하는 자리와 관계마다 풍성한 시적 영감이 넘실거리고, 그 가운데 우리의 부실하고 오염된 언어들이 새롭게 거듭나길 기원한다. 아울러,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과 시인들이 우리의 신학적 상상력을 증폭시켜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심오한 한 줄기가 우리 실존의 절벽에 이르러 전혀 새로운 풍경으로 체험되길 기대해본다.”
_저자 서문에서
익숙한 일상도 언어를 입으면 새로운 빛깔과 모양이 된다. 그렇다면 시가 신학을 입으면 어떨까? 이 책은 신학자인 저자가 시 속에서 발견한 신성에 대해 말한다. 신앙의 언어와 신학의 담론으로 시를 해석하여 현대시에 각인된 종교적 감각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이 기독교인 작가의 작품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백석의 시에서 방랑자의 고독과 신성을 읽고, 김종삼의 시에서 기독교 신앙이 사색의 재료로 기능한다고 읽는가 하면, 김수영의 <풀>은 풀과 꽃과 바람의 이미지가 구약성서와 긴밀하게 연계된다고 이해하고, 종교적 권위를 비틀고 냉소하는 이성복을 읽고, 기형도의 시에서 평범하고 소박한 동네 목사를 발견하며, 안도현의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 나오는 음식과 식사 이미지를 향유의 신학 이미지로 읽는다.
이 책은 시가 쓰인 시대적 배경과 시인의 생활환경은 물론이고, 시 속의 단어, 이미지, 공간, 소리, 움직임 심지어는 마침표와 쉼표의 개수까지 세어가며 꼼꼼하게 시를 풀어준다. 또한 시를 탐독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묵상하여“인문 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이해하던 시 해석에 신학적 해석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더할 수 있다. 아울러 성경과 복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하나님을 제도화된 신조에 옭아매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할 것이다. 신학이 문학성을 담보할 수 있음을 증거하는 이 책을 통해 신학과 문학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더 풍성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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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0 →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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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삶!
성경 속 고대의 이야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 앞으로 생생하게 꺼내어 놓는다. 종교개혁 이래로 성경 읽기(해석)에서 줄곧 이어져 온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성경을 그 시대적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관점은 성경의 배경을 밝히려는 꾸준한 노력으로 이어졌고 저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다. 저자는 신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글쓰기로 성서신학을 일상과 사회, 문학의 영역에 연계시켜 다양한 저술과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고 이 책 《신약의 뒷골목 풍경》도 그 연구활동의 결과다. 저자는 신약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와 삶을 오늘날 우리 앞에 생생하게 펼쳐 놓는다.
- 신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의 자연환경, 민족 구성, 주변 지역의 정치적 상황은 어땠나.
- 신약시대 이스라엘과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어떤 이방신들을 섬겼나.
- 신약시대 유대 사회의 신분계급과 종교지도자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나.
- 신약시대 유대인들의 의식주, 가족과 교육, 예술과 유흥은 무엇이었나.
- 신약시대 유대인들의 직업과 노동, 죽음과 질병, 장례 풍습은 어땠을까
이 책은 그동안 나왔던 어려운 주석이 아니다. 1세기 이스라엘 지역의 정보들을 낡은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관점으로, 지나간 낡은 모습이 아닌 현대인과 대화하듯, 그리고 지식이 아닌 지혜로 성서의 세계를 아주 경쾌하고 진지하게 신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뒷골목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신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삶의 모든 것을 담았지만 학술적인 정보뿐 아니라 신앙적 교훈까지 잘 균형 잡아 놓았다.
성경이 단지 고대의 유물이 아닌 것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함께하기 때문이다!기존의 신약시대 배경사는 주로 정치 제도사를 통한 거대 권력의 변천과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복합적 지형을 아우르는 종교 사상사의 흐름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신약성경의 주요 무대인 지중해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과 사회문화, 그리고 그들 삶의 생존방식을 총체적으로 보여 준다.
“내가 신약성서를 공부하면서 품었던 행간의 궁금증은 마냥 사소한 것들이었다. 가령, 신약성서의 여러 유명 인물들과 그 배후의 이름 없는 이웃들을 조명하면서 내 자질구레한 의문은 엉뚱하게도 그들의 음식 메뉴와 입었던 옷가지, 목욕탕과 변소에서 품었던 내밀한 몽상과 일상의 자잘한 사연들, 특히 남녀상열지사에 개입한 성욕과 혼인과 부부관계, 출산과 양육, 노동과 밥벌이의 애로사항 등에 관한 것이었다.” - 저자 서문 중에서
그러면서 이 책은 그런 총체적인 문화와 삶을 ‘뒷골목’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남들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닌 내밀한 모습을 통해 드러난 그들의 삶의 현장을 꺼내어 놓았다.
“역사 서술의 은유적 표상으로 ‘뒷골목’을 설정하고 그것을 ‘신약성서’와 연동시킬 때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딱딱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당대의 모든 생명들이 제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 생활의 ‘현장’이었다. 이것이 굳이 내가 신약성서 ‘배경사’를 넘어 1세기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의 복잡다단한 생활상을 ‘뒷골목’의 ‘풍경’으로 재구성해 보고자 한 골자였다.” - 저자 서문 중에서
그래서 저자는 냄새 나고 지저분한 인간의 속살을 비집고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박인환) 그들 생활의 발견에 더 치중하는 방식으로 ‘뒷골목’ 뒤지기 작업에 몰두했다. 거기서 그는 화석이 된 거룩한 역사적 인물들의 전후좌우로 꿈틀 거리며 약동한 구체적 자연과 인간 대중을 우리의 현실로 꺼내 놓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신약성서의 세계를 우리의 믿음과 신앙 안에서 보려고 했다. 성경에 등장한 사건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의 확인으로 끝나버린 단절된 역사가 아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연결되어 온 살아 있는 진리임을 드러내 준다. 이 책은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에 접근하게 풍부한 자료도 제시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깊은 하나님의 의도를 밝히려는 ‘뒷골목’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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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 → 12,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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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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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난해 구절, 오해되고 외면받아온 본문에 대한 창의적이고, 설득력 있고, 올바른 해석!
인습과 관행에 매인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우리 신학계의 괴물, 차정식의 신약 독법“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는 전투적일 만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무리를 놀라게 했던 세금 논쟁의 진실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께서 옥에 갇힌 영들을 찾아가셨다고 하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은 대체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는 구절은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구원론을 설파하는 것인가?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성서학자 차정식 교수가 40편의 글에서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세밀하게 검토한 뒤 가장 타당한 해석을 찾아간다.
출판사 리뷰인습과 관행을 넘어서는 치열한 성경 읽기
우리 신학계의 괴물, 근면한 성서학자 차정식의 신약 독법“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이 구절은 전투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무리를 놀라게 했던 세금 논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로마서 13장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수께서 옥에 갇힌 영들을 찾아가셨다고 하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은 대체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는 구절은 아이를 낳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해괴한 구원론을 설파하는 것인가?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는 이 같은 신약의 난해 구절, 십중팔구 오해되거나 외면받아온 구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그간 왕성한 에너지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며 묵직한 저작들을 산출해온 차정식 교수가 성서 해석의 길잡이로 나섰다. 인습과 관행에 물든 성서 해석과 치열하게 씨름해온 저자는 문제의 구절들이 자리한 전후의 맥락과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 그리고 이들 구절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해석을 검토한 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을 찾아간다. “학계의 동의를 거쳐 웬만한 결론이 나와 있는 부분은 좀 더 담대히 주장했고, 무엇이 바른 해석이고 온전한 의미인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보다 설득력 있게 대안을 내놓을 만한 꼭지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최선의 선택을 암시하기도” 했다.
시발점은 지난 2012년 10월 저자의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이를 보완해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라는 글이었다. 그 글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아람어 ‘아바abba’가 우리말의 ‘아빠’에 해당한다는 통념이 서구의 한 유명 신학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친밀하게 ‘아빠’로 부르고 싶은 감상주의를 부추겼고 미성숙한 자아를 감성 일변도의 신앙 취향으로 땜질하려는 경향을 낳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네티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의 말씀에 대한 갈증과 함께 그것을 바로 해석하고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허기”가 심하다는 점을 확인한 이 일 이후, 2년여에 걸쳐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현대종교〉에 글을 연재했고, 그 40편의 글을 엮어 책으로 펴냈다.
편의주의와 아전인수식 해석을 넘어서신약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와 오늘의 독자 사이에는 2천 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문화적 차이라는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어 원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성서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예를 들어,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하신 말씀(마 10:5-6,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과, 부활 사건 이후 주신 당부(마 28:18-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앞에서 독자들은 예수께서 이방인 선교를 명령한 것인지 금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성서 해석과 관련한 이러한 문제는, 특히 대체로 지성적 탐구보다는 화끈한 ‘믿음’을 강조해온 한국 교회에서 더 심각하다. 성서 해석상의 어려움을 치밀하고 끈질긴 정공법으로 돌파하기보다는, 편의적으로 혹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왜곡된 이해를 유통시키는 경우가 잦았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는 구절로 흔히 사용되고 있고, 고린도전서 13장 등지에서 가져온 ‘덕스러울’ 것에 대한 강조는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일을 넘기고 마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의 ‘거꾸로 읽는’은 ‘전복적으로 읽기’에 앞서 일차적으로는 ‘바로 읽기’를 의미한다. 그간 잘못된 해석이 워낙 광범위하게 유통되어온 터라, 제대로 읽는 것은 기존의 해석의 문제를 바로잡으며 거꾸로 읽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성서의 독자들을 무지와 맹목에서 벗어나도록 계몽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일차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이단의 빈약한 성서 해석을 넘어서이 일이 중요한 것은 이런 무지와 맹목이 이단 사이비의 모판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잘 알려진 천국 비유 중 가라지의 비유(마 13장)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뽑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주인의 말은 때로 기성 교회에서 “개혁이니 변화니 하는 구호로 교회의 내부 질서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잘못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단 종파에서는 “이 세상의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현상 자체에 착안하여 자신들의 선택받은 위상을 ‘알곡’으로 치부하고 나머지 기성교단의 사람들은 타락한 가라지 세력이라며 공격을 일삼는”(97쪽)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들은 다양하고 풍성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비유조차 자기 종파의 교리적 틀에 때려 맞춘 모범답안을 강요하기 일쑤인데,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런 빈약한 모범답안에 쉽게 현혹된다.
“이단자들은 간단명료한 틀로써 교주가 제시하고 승인한 해답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해온 것만 늘 되풀이하고 그 되풀이의 감옥에 갇혀 스스로 강박적 신앙의 포로로 산다. 그러나 강박과 신앙이 어찌 행복하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이단자들의 신앙 패턴과 삶을 대하는 기본 태도에 자주 황당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주체적인 질문과 모험적인 탐구의 의욕이 없기 때문이다”(62쪽).
최근 한국 교회는 내부의 타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편, 밖으로부터는 신천지 등 이단 사이비의 침투에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부심하다. 한국 교회의 타락과 이단의 창궐은, 결국 오도되고 빈곤한 성서 해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다시 꼼꼼하게 성서를 읽고 비판적으로 신앙을 점검하는 데서 안팎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 설교자들을 포함, 성서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나아가 성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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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0 → 14,4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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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 사회에 인문학 광풍이 몰아친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기업에서, 관공서에서, 심지어 문화센터에서까지 각종 인문학 강좌가 러시를 이루었다. 물질문명이 가져다준 정신적 빈곤함과 비인간화 현상에 대한 반성과 반동으로 인문학이 다시금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정확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더욱이 인문학마저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혹은 스펙 장착의 도구로 오용되는 현실도 심심치 않게 목도한다. 그 결과 사회 곳곳에 인문학의 아지랑이가 모락거리는 동안에도,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는 가장 반인문학적인 야만 사회로 치닫는 것이 현실이다.
얼핏 『예수 인문학』이란 제목은 어감이 매끄럽지 않거나 개념상의 균형이 깨진 조합처럼 느껴진다. 예수는 당연히 성서 혹은 신학과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예수와 인문학을 연결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등등 여러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예수야말로 인문학의 중요한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다음 네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예수는 일상의 모든 사건과 행동, 풍경 등을 가벼이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예리하고 섬세한 눈길로 평범한 소재 안에 담긴 우주의 이치와 인간사의 진실을 포착하여 그것을 자신의 가르침의 소재로 삼았다. 이렇게 예수에게 일상은 그 자체로 학습의 장이었고, 교과서였고, 도반이었다. 예수의 삶 자체가 곧 인문학적 삶이었던 것이다. 둘째, 예수는 유대교의 강고한 전통과 인습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거나 수긍하지 않고 항상 그것에 대한 도발적 질문과 전복을 통해 종교와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했다. 인문학이 내재한 가장 중요한 기능이 의심과 비판이라고 할 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바로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셋째, 예수는 땅의 이치와 사건을 발굴하고 가공하여 결국 하늘의 이치를 풀어 펼치는 데 사용한다. 예수에게는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 늘 하나로 통합된다. 예수야말로 융합의 원조 격이었으며, 그의 인문학은 또한 신학이기도 했다. 넷째, 예수는 고립되고 밀폐된 공간에서 학자연하는 서생이 아니라, 현실의 불의한 정치와 군사 체제에 맞서 폭력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폭력을 해체시키는 메시아적 변혁가로서의 모습을 시연한다. 우리가 인문 정신을 계발하고 그것을 공교히 만드는 목적이 결국은 현실 세계의 모순과 불의를 타파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함이라고 할 때, 예수의 모든 공부의 마침표가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것이 던지는 시사점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이렇게 저자는 예수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여정을 특유의 번뜩이는 관찰력과 상상력의 돋보기로 들추어내면서 총 50가지의 주제를 씨줄과 날줄 삼아 예수 인문학이란 아름다운 옷감을 직조해낸다.
저자는 한국 개신교 안에서 전복적 상상력과 유려한 문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 세계를 구축해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50개의 짤막한 단상으로 이루어진 묶음집이지만 그 내용은 가볍게 볼 수 없다. 저자는 인문학을 전면에 포진시키면서도 실상은 그 배면에 예수의 신학이 출현하게 된 정신적 사유와 관찰의 과정을 탐구함으로써 실상은 또 하나의 고유한 개성을 가진 “예수전”을 썼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둘러싼 기독론과 구원론에 대한 신선한 이해와 더불어, 신학과 인문학의 만남 내지 통섭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꼭 일독을 해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