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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느 곳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헤르만 바빙크의 일반은총』은 1894년 12월에 깜픈 신학교에서 두번째 교장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했던 이임 연설입니다. 이 연설과 더불어 이후에 쓰인 “칼빈과 일반 은총”에서 바빙크는 성경과 교리에 근거하고, 동시에 경험에 호소하면서 창조에서 나타나는 선한 질서인 일반 은총을 추적합니다. 일반 은총은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곧 창조와 언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만물을 보존하십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인간 본성의 이해의 차이를 불러왔고,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결국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 도피를 선택하거나, 자연적 삶을 초월하기 위해 신비주의를 따라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전의 질서에 환멸하고 도망쳤던 이들은 이전보다 더 정교하고 폭력적인 체계에서 고통 받으며, 합리성의 환상을 쫓았던 자들은 그 환상의 비합리성에서 좌절합니다. 여기서 바빙크는 자연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역설합니다. 자연은 창조자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구속이 펼쳐지는 장입니다.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일반 은총에 따라 현실에 직면하고 향유하며, 특별 은총에 따라 현실을 구속합니다.
“구원의 확신에 힘입어 마귀와 죽음에 담대히 맞서지 않는 자는 신자가 아니다.”현실에 직면하는 신앙, 이것이 헤르만 바빙크가 개혁주의의 신앙이 다른 어떤 교파와도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으로 내세운 신앙입니다. 이 특징은 자연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옵니다. 이 차이 때문에 일부는 자연적 삶을 없애면서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 도피를 선택하고, 일부는 자연적 삶을 초월하기 위해 신비주의를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식의 삶의 태도를 여러 군데에서 봅니다. 먼저는 국가와 학교와 교회에서 도망쳐 세운 모든 종류의 공동체 생활에서 엿볼 수 있으며, 그리고는 종교를 초월하려는 과학과 기술의 합리성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질서에 환멸하고 도망쳤던 이들은 이전보다 더 정교하고 폭력적인 체계에서 고통 받으며, 합리성의 환상을 쫓았던 자들은 그 환상의 비합리성에서 좌절합니다.
이 교차점에서 바빙크는 자연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역설합니다. 자연은 창조자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구속이 펼쳐지는 장입니다.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일반 은총에 따라 현실에 직면하며, 특별 은총에 따라 현실을 구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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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서론 중에서]그리스도인으로서 일반 은총에 관해 살피는 일은 왜 필요한가? 일반 은총과 같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 같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알아보아야 하는가? 필자는 이런 질문에 대해 세 가지 항목으로 답변하고자 한다.
(1) 첫째, 누구든지 개혁파 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일반 은총의 가르침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주었지만, 개혁파 신앙과 일반 은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견지하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전적 부패를 인정하는 가운데 이 세상의 삶과 문화 속에서 적극적이고 고상한 가치를 발견하다면, 그에게 허락되는 최종 귀결은 하나님의 전(全) 포괄적 호의-이것이 곧 일반 은총인데-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전술한 세 가지 사항-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전적 부패, 진리, 도덕적 선, 미적 가치의 세상 속 실재-가운데 최소 어느 하나를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실상에 있어 그리스도인이 일반 은총을 수용하고 배우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이상과 같은 논리적 추론 작업 때문은 아니다. 보통은 성경과 개혁 신학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중 이 교리에 접하고 또 그 내용을 파악하는 식이 된다. 그러나 순전히 논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혁파 신앙을 표방하면서 일반 은총에 대해 모른다든지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개혁파 신앙인이라 자처한다면-아니면 개혁파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면-필히 이 주제의 이해와 학습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일반 은총에 관한 성경적 증거를 살펴보도록 하라.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탐구의 정신 가운데 정독해 보라. 일반 은총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자료들(이 책자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을 입수하여 읽도록 하라. 이로 말미암아 당신의 개혁 신앙은 더 깊어지고 더 알차게 영글 것이다.
(2) 둘째, 일반 은총의 가르침을 통해 구속사적 발전의 전반적 흐름을 꿰뚫어 조망하게 되고 이 주제와 연관된 다양한 신학적 이슈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 은총의 가르침을 면밀히 살피다 보면, 이 주제가 성경의 근본 토대인 구속사적 발전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카이퍼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다. 카이퍼는 일반 은총의 작동 원리를 하나님의 작정에서부터 찾고, 창조-타락-구속-종말의 구속사적 사건(epoch)과 연관시키며, 문화물이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입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스킬더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비록 그가 일반 은총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반대했고, 문화적 사명의 주체를 그리스도인에게서만 찾았으며, 문화물의 천국 영입이라는 관념을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우는 문화적 사명은 구속사적 발전과 맥을 같이한다. 스킬더는 창조 이후 주어진 문화 명령을 출발점으로 하여, 타락 전후에 드러난 언약 및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 종말에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사단과의 문화적 쟁투 등을 일관성 있게 엮은 뒤, 천국에서의 안식으로 자신의 이론을 마감한다.
일반 은총을 기독 신앙의 부록이나 미천한 소주제로 여겨 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가르침이 기대 밖의 신선감을 선사하고 또 크나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들-신앙의 연륜이 짧거나 신학 지식에 대한 경험이 적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풍요로움이 오히려 번쇄하고 현학적인 것으로만 인식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인상이 너무 이 책자를 일단 접어 두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 재독을 시도하는 것도 현명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다면, 다소 난삽하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일반 은총과 관련된 여러 주제들-작정, 언약, 은혜, 구원, 중보자, 종말, 천국 등-을 곱씹으며 살피는 것도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주제들 역시 개혁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안들이므로, 어차피 그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일반 은총은 결국 기독 신앙의 요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구속사적 발전, 그리스도인의 사명, 종말론적 비전이 담겨 있기에 이 주제에 대한 고찰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3) 셋째,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통찰력과 근원적 지혜를 얻으려면 일반 은총에 대한 성찰이 전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문화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또 문화 사역에 더 열을 올리는 시대인 것 같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화적 사명의 신학적 뿌리나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는 무지가 깊다. 심지어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을 끊임없이 운운하면서도 그 용어의 성립 배경이나 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반 은총에 관한 탐구는 이상과 같은 오류나 소홀 행위를 미연에 방지해 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인류 문명의 발전, 이 세상의 문화적 업적과 문화 활동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또 문화적 사명의 본질을 어디에서 찾고 어떤 실행 원리에 착념해야 할지 근본적 안목의 수립에 적잖은 도움을 준다. 아울러 문화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의 형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문화적 분별력을 함양하는 일 또한 유익의 항목으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일반 은총의 내용을 습득하면 이것이 자연스레 대중 문화의 변혁에 대한 적실한 아이디어를 획득하도록 돕는다든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화 사역에 필요한 구체적 방향을 제시한다든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혜택이 일반 은총 (및 문화적 사명) 자체의 가르침으로부터 연유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그런 사항들은 현 시대의 문화적 형편을 잘 알고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의 사역적 경험과 감각에다 기대를 거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 은총의 가르침은 우리의 관심사인 바 적실한 지침이나 구체적 사항들의 건전성과 타당성을 가늠하는, 신학적 표준이나 원리를 제시해 준다. 이런 점에서 일반 은총의 도움이 없이는 문화적 사명에 대한 통찰력과 근원적 지혜의 획득이 힘들어질 것이요, 후자가 결여된 시대적 지침이나 구체적 방안들은 까딱 잘못하면 견실한 신학적 닻에서 떨어져 나가 비성경적이고 심지어 비기독교적인 표류를 초래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일반 은총의 내용을 성찰하는 일은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견지하는 바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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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타락한 세상 속의 문화와이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리처드마우가 보여주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기독교의 가능성!
“세상이 정말 완전히 타락했고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세상에서는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두 집단의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이 차이점의 강조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기독교를 다른 어떤 종교보다 배타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이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정말 그를 믿는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시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믿지 않는 자들의 선한 행위, 놀라운 업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은혜 같은 것”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개혁주의 전통은 이러한 질문에 “일반 은총”이라는 범주를 사용해 설명해 왔으나, 이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 개혁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인 리처드마우는 이 책에서지금껏 간과되어온 “일반 은총”을 주제를 다룬다. 그는 수세기 동안 다양한 신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해온 주제를 다루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하나님의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의 보편적 인간성을 강조하거나 완전히 타락해버린 인간성을 강조하는 두 가지 전통을 깊이 있게 살피면서, 자신만의 특별한 통찰력으로 일반 은총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로써, 자칫 차갑게만 보일 수 있는 칼빈주의에 대한 선입견 한가운데서 따뜻한 온기를 지닌 기독교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역설하고, 기독교가 어떻게 전체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해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이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운 것 가운데 빛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