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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위그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박해로 인해 프랑스를 떠나 각국에 디아스포라처럼 살면서도 그 땅의 산업화에 기여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칼뱅이 생전에 어려움을 당한 위그노를 영적으로 지도하고 돌보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칼뱅과 위그노와의 관계를 좀 더 깊게 알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다 류석춘의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다.
베버는 칼빈주의 예정설 때문에 구원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견디지 못한 기독교 신자들이 현세에서 생활을 근면 성실하게 영위함으로써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본의 아니게 성립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경제적으로 앞선 네덜란드 공화국을 제치고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영국이 왜 산업화에 먼저 성공했는지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류석춘, 2016)
이 글을 읽으며 경제적으로 앞선 네덜란드 공화국을 제치고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영국이 왜 산업화에 먼저 성공했는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위그노에 대한 연구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그노가 이들 나라의 산업화, 상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유럽의 산업 발전은 프랑스를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 산업은 앞서 있었고, 위그노들이 중추 역할을 맡았다.
나아가 프랑스 개신교도들인 그들이 살해, 추방, 재산몰수 등 각가지 박해를 받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왜 그리 없었는가에 대한 미안함도 작용했다. 위그노는 한 마디로 핍박 속에 살아온 신앙의 사람들이다. 새로운 믿음을 가졌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온갖 박해와 추방과 심한 경우 화형이었다. 그들은 가장 부정적인 환경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소명, 곧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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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북스는 『우리가 위그노다』를 2024년 9월 5일 출간했다. 이 책의 저자인 성원용 목사(파리선한장로교회 담임)는 자타가 공인하는 위그노 전문가다. 그는 지난 20여년 간 위그노들을 연구하고, 수없이 현장을 방문해 그들의 역사를 추적해 온 위그노 전문가다. 2021년 위그노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위그노처럼-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을 출간했고, 2023년에 한 달 묵상집인 『위그노처럼』을 출간해 국내에 위그노를 널리 알렸다. 이번에 디아스포라 위그노의 역사를 다룬 『우리가 위그노다』는 성 목사의 위그노 연구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위그노란?》 위그노는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을 가리킨다. ‘위그노’(Huguenots)라는 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 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eunots)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그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분투, 노력했다는 점이다. 가톨릭 중심의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500여 년간 투쟁했다. 참혹한 박해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 그들의 믿음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지금까지 프랑스는 물론 유럽과 한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을 바꾼 디아스포라 위그노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중한 책》『우리가 위그노다』를 읽어나가노라면 박해 때문에 세계 각지로 흩어져야만 했던 위그노들이 자신을 받아준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오직(Sola)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5대 솔라’의 원리를 붙들고 비본질에 저항했다. 그로 인해 핍박을 당하거나 죽거나 가족을 저버려야 했다. 또한 자신들의 조국 프랑스를 등지고 나그네가 되어 낯선 나라로 떠나 길고도 험난한 광야의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받아 준 나라와 도시에서 위대한 역사를 일구어냈고, 오늘날 우리 개신교의 전형인 ‘프로테스탄트’의 모델이 되었다. 디아스포라가 되어 자신이 처한 나라와 지역에서 광야의 삶을 사는 동안 그들은 그 나라와 세계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박해로 인해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 프랑스를 떠난 디아스포라 위그노들의 삶은 외롭고 고달팠지만, 그들이 가져간 복음과 기술, 지식과 예술은 그들을 영접한 도시와 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축복의 도구가 되었다. 위그노들은 가는 곳마다 삶으로 믿음을 전염시켰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회유하거나 꺾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디아스포라 위그노와 한국 크리스천, 한국교회》현재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는 700만 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40%가 그리스도인이다. 한인 디아스포라 역시 위그노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존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책을 읽다 보면 새삼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사명을 가진 21세기의 위그노로 우리를 부르셨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모쪼록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성도들이 위그노와 그들의 디아스포라 역사를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디아스포라 위그노처럼 시대를 거스르는 강력한 믿음으로 세상 나라와 역사를 변화시키는 주역들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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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는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을 가리킨다. ‘위그노’(Huguenots)라는 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 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eunots)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위그노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분투, 노력했다는 점이다. 가톨릭 중심의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500여 년간 투쟁했다. 참혹한 박해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 그들의 믿음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지금까지 프랑스는 물론 유럽과 한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성원용 목사(파리선한장로교회 담임)는 20여 년간 위그노들을 연구하고, 수없이 현장을 방문해 그들의 역사를 추적해 온 위그노 전문가다. 성 목사는 위그노들이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10가지 교훈으로 묶어 <위그노처럼>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는 위그노와 위그노의 이야기, 그들을 통해본 기독교사, 위그노에게 배우는 교훈, 가 볼 만한 위그노 유적지 등이 담겨 있다.
《위그노,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위그노는 16~18세기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지금도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위그노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위그노의 정체성을 붙들고 있다. 그들은 1598년 4월 13일에 위그노였던 앙리 4세가 선포한 낭트 칙령(L’edit de Nantes)으로 잠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1685년 10월에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려고 선포한 퐁텐블로 칙령(L’edit de Fontainebleau)으로 87년간의 자유시기를 마감하고 102년간의 길고 긴 고난의 여정으로 들어갔다. 그 기간에 개신교의 예배처소는 헐리거나 불탔고 외국으로 도피하지 못한 목사와 설교자들은 잡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가 평생 배 밑창에서 노를 젓다가 죽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강제 개종을 당했고 개종하지 않은 성도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루이 14세는 국경을 봉쇄해 외국으로 탈출하는 위그노들의 길을 차단했다. 참혹한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 개신교 역사는 이 시기를 ‘교회의 광야 시대’라고 부른다. 이렇듯 위그노 500년 역사는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역사로 믿음의 본질을 향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은 세대에서 세대에 이어지며 잠든 우리를 깨우고 있다.
《위그노의 이야기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울림》왜 지금 한국교회에 위그노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그것은 한국교회가 믿음의 본질에서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난무한 가운데 방향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 무언가 새롭게 한국교회를 이끌 이정표가 필요하다. 특별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팬데믹 시대에 한국교회는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했다. 어떻게 보면 차원이 다른 새로운 종류의 신앙의 도전 앞에 선 것이다. 이럴 때,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켰고 광야로 쫓겨 가면서도 이동식 강대상을 마련하면서까지 예배를 드렸던 위그노의 삶과 신앙이야말로 지금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이제부터라도 위그노의 삶과 신앙을 이정표 삼아 그들처럼 살아간다면 새로운 부흥은 시작될 것이다. 국민북스는 그런 염원을 담아 이 책의 제목을 ‘위그노처럼’이라고 지었다.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저자 성원용 목사는 위그노들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용기를 내라 2) 고난을 감당하라 3) 저항하라 4)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라 5) 개혁자로 서라 6) 톨레랑스하라 7) 5개의 솔라(Sola)를 기억하라 8) 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을 추구하라 9) 교회를 교회되게 하라 10) 주 안에서 행복하라
이 책의 독자들이 책이 기록된 이 10가지 교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그 교훈들을 각자의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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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위그노 연구소 연감 세 번째,
멜란히톤과 깔뱅의 서신을 통해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따르고자 고난의 삶을 감당하고 위대한 성도의 삶을 산 위그노를 만날 수 있다.이 책에서는 종교개혁 초기 중심지인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대표적 개혁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과 프랑스 개신교 피난민 중 대표적 개혁자 깔뱅(Jean Calvin, 1509-1564)의 서신 교환을 살펴보려고 한다. 두 개혁자들은 29차례의 서신 교환을 가졌다. 당시의 서신 교환은 둘 사이의 개인적인 의사소통을 넘어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신학적 정치적 입장선언과 토론과 논쟁과 협의의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서신교환의 의미를 정확하기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멜란히톤과 깔뱅의 서신 교환은 1540년대에서 1550년대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과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서신의 내용에 더하여 당시의 정황을 가급적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런 방식의 설명을 통해 종교개혁의 인물들과 신학이 어떤 현실적 배경에서 연결되고, 발전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당시 역사적 신학적 정황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서로 이해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서신 교환을 통해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의 신학적 연결고리를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위그노와의 연결고리 역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멜란히톤은 독일 브레텐(Bretten) 출신으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와 튀빙엔(Tubingen) 대학에서 공부하고 철학석사 학위(M.A.)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518년 비텐베르크의 헬라어 교수로 임용된다. 이후 그는 독일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이자 교육 개혁자요, 종교개혁 1세대의 대표적 신학자로 활동하였다.
깔뱅은 프랑스 누와용(Noyon)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하다가, 개혁자의 길로 돌이켰던 인물이다. 그는 종교개혁 2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독일의 개혁자들의 책을 통해 종교개혁 신학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멜란히톤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깔뱅은 개혁신앙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으로 프랑스를 떠나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제네바에 정착하여 활동하였고, 개혁파 신학의 대표 신학자로 인정받았다. 특히 프랑스 개신교회를 위해 목사와 선교사를 교육하여 파송하는 큰 역할을 감당했고 위그노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위그노(Huguenot)는 프랑스의 개신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프랑스 개신교는 여러 이유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종교개혁의 시작이 독일이었고, 프랑스는 그 영향을 종교개혁 초기부터 받았지만, 중앙집권적 왕권국가에서 가톨릭에 치우친 정권의 강력한 저지로 종교개혁은 상당한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엄청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많은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성경에 따른 참 신앙을 지키고, 바른 교회를 세워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이유에서 한편으로 프랑스 내에서 그들의 세력은 작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지속된 핍박 속에서 많은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결국 본토를 떠나야 했다. 깔뱅이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렇게 떠나 새로 정착한 곳에서도 그들이 원하는 신앙생활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대부분 개혁파(Reformed)였던 반면, 그들이 피난한 주요 장소 중 루터파(Lutheran)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으로 인해 조국 프랑스에서 핍박을 받았고, 떠난 피난지에서도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위그노는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따르고자 고난의 삶을 감당한 위대한 성도의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 증거를 멜란히톤과 깔뱅의 서신 교환 중에서 찾게 될 것이다. 피난지에서 위그노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되었는가에 대한 당시 상황과 위그노의 신앙에 대한 현실적 예를 볼 것이다.
멜란히톤과 깔뱅의 교환서신은 총 29개이다. 이 책에서는 서신들을 시기별로 첫째, 첫 만남, 둘째, 하나를 위한 노력, 셋째, 전쟁 이후, 넷째, 종교평화와 위그노라는 제목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멜란히톤과 깔뱅을 통해 종교개혁이 한 국가나 한 도시에 제한된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유럽의 전체적 사건이며 당대의 정치적 영향뿐만 아니라 신학적 사조의 영향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진 사건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또한 두 인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핵심 주제와 관심, 통일성이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개신교인들, 위그노가 종교개혁의 뿌리인 비텐베르크와 어떤 정치적 신학적 관계를 가지는가를 어느 정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서론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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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는 쇠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일어난 여러 나쁜 현상들을 미루어볼 때, 이 같은 우려가 전혀 틀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서 마음속 한 구석에서 슬그머니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교회가 쇠퇴하지 않은 적이 정말 있었을까요? 빛의 이면에는 언제나 어둠이 붙어있는데, 한동안 빛이 너무 밝아서 어둠이 안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요. 도리어 빛이 밝은 만큼 어둠도 진했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단지 밝은 빛에 도취되어 어둠이 언제나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한국교회는 성장과 부흥의 시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성장은 외형의 성장이었고, 부흥은 인구의 부흥이었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교회에서 내면의 성장은 매우 미약했고, 속사람의 부흥은 아주 희박했습니다. 어쨌든 상승과 부흥의 고비를 넘어섰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어떤 방식으로건 서서히 고난의 시기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상황이 기독교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머지않아 기독교는 그런 불리한 상황에 맞서 싸울 힘을 크게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까? 고난에 대한 이해와 대처의 모범답안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론적으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실제로는 이행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온 몸으로 고난을 받아들이고 온 생으로 고난을 대처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답안을 피부로 훨씬 따갑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신앙의 고난이라고 하면, 역사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통칭 “위그노”라고 불리는 프랑스 신교 신자들입니다. 위그노란 넓게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테두리 안에 들어있는 프랑스 신교라고 정의하고, 좁게는 쟝 깔뱅의 신학과 사상을 대폭 수용한 개혁파 교회라고 정의합니다. 나중에 그들은 유럽을 비롯하여 신대륙 미국과 남미 그리고 남아프리카까지 이주하여 광범위한 개혁파 신앙 세계를 이룩하였습니다.
위그노는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이 받았던 가혹한 박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위그노의 여러 면모를 살피다보면 언제나 통증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박해입니다. 종교개혁이 프랑스에 유입된 16세기 초부터 프랑스 혁명과 근대의 종교정책에 이르기까지 위그노는 자그마치 거의 5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자기를 향해 끊임없이 내려치는 크고 작은 고난의 도리깨를 견디며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위그노의 박해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해하고 대처하며 고난 중에도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모범답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지막에는 심지어 순교라는 비싼 값을 치른 위그노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주는 교훈입니다.
우리 학교는 앞으로 한동안 어려운 상황을 살아내야 할 한국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며 위그노의 역사를 소개하는 “합신 위그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나는 프로젝트의 디렉터로서 이 포켓북을 저술하였습니다. 위그노의 역사는 혹독한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켜낸 생생한 현장이기 때문에, 나는 한국교회가 위그노의 역사를 배울 때 힘찬 격려와 밝은 지침을 받을 것이라 크게 기대합니다.
이제부터 위그노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보는 가장 쉬운 방식은 연대기 순서로 따라가는 것이므로, 위그노의 역사를 프랑스의 왕정과 근대의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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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교도를 통틀어 일컫는 위그노는 종교개혁 어간부터 박해와 피난을 겪으면서 지금 소수로 남기까지 자그마치 500년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위그노가 이처럼 긴 고통의 역사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며, 보장된 성공과 소중한 삶터 그리고 고귀한 목숨까지 신앙을 위해 아낌없이 내버린 위그노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여러 사건들과 여러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여 온갖 모진 고난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려 했던 위그노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영화처럼 보여준다. 독자는 이 책으로부터 신앙을 위한 프랑스 위그노의 희생을 톡톡히 읽어낼 것이다. 믿음을 위해 흙에 쏟은 붉은 피, 박해 앞에서 공포에 찌든 마음, 기나긴 피난생활로 타버린 육체, 그리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도 감사하던 뜨거운 눈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