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성경의 지배적인 핵심 단어 ‘루아흐’의 다면성에 근거한 세심한 연구로 하나님의 영에 대한 균형 있고 통전적인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특히 구약성경에 기술된 이스라엘 역사 속 루아흐에 연관된 동사들을 중심으로 루아흐의 다양한 의미를 밝힌다. 불어오고, 쉼쉬거나, 임하거나, 강림하고, 전달되거나, 부어지며, 충만하고, 정결하게 하고, 이끌고, 인도하는 루아흐에 대한 조명은 오늘날 신약과 구원 중심의 성령론의 한계를 넘는 활기차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온 세상의 구원과 삶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 성경의 성령론이 제기하는 어려움들이 있긴 하지만, 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다양한 모양과 장소, 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이 가졌던 이해를 되살림으로써 풍성해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의 구성처럼, 우리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며 루아흐의 임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굴의 정신을 되찾는다면, 우리의 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유연해지기까지 할 것이다. 마치 불어오고, 숨쉬며, 오고, 머물며, 전달되고, 부어지며, 채우고, 깨끗하게 하며, 이끌고, 인도하는 영처럼. 내가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이 일이 늘 깔끔하고 명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니콜 노더만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영을 연구할 이유가 있다.
“야생의 들풀처럼 자유롭게 자란, 복잡하게 얽힌 뿌리를 파헤쳐 보기 위해.
그래서 지상에서 아름답게 활짝 핀 꽃을 경탄하기 위해.”-P.32
시인이 짧은 인생 동안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존재의 냉엄한 현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사망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숨의 부여를 통해 드러날 수 있고, 그로써 땅의 얼굴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P.48
다른 말로 하면, 영은 새로운 언어나 색다른 환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영은 발람이 원래 가졌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게 만들 따름이다. 발람에게 영이 불러일으킨 영감은 미래, 전례 없는 예견, 장차 도래할 세상에 관한 경이로운 전망을 위한 틀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진 것과 같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그런 명확한 인식, 그런 궤도 수정이야말로 영의 본질적 역할이다. 그런 명확한 인식이 예언의 본질이다.-P.63
사사기와 역대기는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많은 진전이 있다. 사사기에서 영은 해방의 행위에 영감을 주었지만, 역대기에서 영감된 화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싸우지 ‘말도록’ 호소할 수 있다. 사사기에서 영은 행위에 영감을 주었지만, 역대기에서 영은 놀라울 정도로 엄밀하게 전통으로 가득한 연설, 곧 정치적, 예언적, 제사장적 연설에만 영감을 준다. 사사기에서 영은 대체로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을 갈망하던 곳, 즉 권력의 중심에서 먼 곳에서 일어났지만, 여기서 영은 공공 정치의 장에서 왕과 그 주변의 권력자들에게 말을 한다.-P.82
그러나 이를 유토피아적 이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관점일 것이다. 이 이상이 가진 힘, 그 역동성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서 정의를 이루는지에 있다. 통치자의 영감된 리더십은 친절히 살아가며,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관대한 사람들로 가득한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자연스레 나타나지 않는다.9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눕는 새 에덴에는 독사들에게 둘러싸인 젖 먹는 아이도 있고 독사의 굴에서 장난하는 젖 뗀 아이도 있다. 조화와 완전함의 이 이상은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11:11) 될 안전이 필요한 분열된 백성에게 주어진다.-P.93
여기서의 전제는 사울의 예언 경험이 광야에서 장로들의 예언에 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에 같은 히브리 어근, nb’가 같은 히트파엘(hithpael)형으로 사용되며 평행하는 경험을 보여 준다. 또한, 두 이야기, 선지자 무리와 예언하는 장로 무리 모두에는 무아경의 전염을 보여 주는 공동체적 측면이 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에 어느 정도의 동의가 있다. 곧 사울이 다른 인물로 변화되었다(삼상 10:6)는 사실은 장로들 또한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보여 준다. 심지어 칠십 인의 장로와 함께하지 않았던 두 명의 장로에게도 같은 일이 생기자 모세는 이를 기꺼워한다. 모세는 들떠서 말하는 듯하다.-P.116
이 설명에 따르면, 여호수아는 루아흐를 주입받았다. 이 영의 유입은 모세의 안수와 직접 관련이 있긴 해도, 안수 자체가 여호수아에게 극적 능력을 발생시킨 것은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여호수아에게 자연스럽게 생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모세에게 안수받음으로써 지혜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자를 찢어 죽이지도, 예언에 참여하지도, 거인을 쓰러트리지도 않는다. 모세의 안수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성취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는 영 때문이라고 여길 수 없다. 이제부터는 여호수아의 지혜가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다. 그의 이름을 딴 책의 첫 부분에서 그 점이 상당히 부각된다.-P.126
루아흐는 단순한 숨, 몸의 물리적 생기가 아니다. 루아흐는 흔히 세례나 다른 어떤 신앙의 행위, 또는 전례에 결부된 구원의 선물도 아니다. 루아흐는 하나님이 특히 활기차게 거하시는 인간의 중심(이를 마음과 영혼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을 보존하신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영을 세우신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영을 받으신다.
삶은 숨인 루아흐 이상이다. 삶은 구원의 근원인 루아흐 이상이다. 삶, 참된 삶, 활기찬 삶, 생기 넘치는 삶은 영-숨의 정직함, 거룩함, 자원함, 회개와 함께 경험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모든 숨이 정직함, 거룩함, 자원함, 상함을 향한)은 하나님의 임재-얼굴(파님)을 기민하게 의식한다.-P.187-8
저자는 정통 기독교 신학의 성령론이 신약 중심적이고 구원 중심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루아흐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한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사사들과 선지자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며,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과 기술, 지혜와 통찰력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영성과 일상, 신앙과 삶을 통합적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최 지 승 박사 | 백석대학교 구약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