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89~91쪽 '제10장 예수 그리스도'중에서]
기독교 신앙의 대상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이 되기를 의도하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시간 안에서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영원히 사람이 되시고 또한 그렇게 계실 것이라는 행동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아들의 이 사역은 그 자체 안에 그것의 전제로서 아버지의 사역과 그것의 결과로서 성령의 사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과 더불어, 우리는 이 본문에서 실제로 특별히 명쾌하게, 그리고 단순히 외견상으로만 그 모든 것의 핵심이 아닌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더욱이 이 강의의 서론에서, 우리가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였을 때와, 첫번째 강의에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전능하신 분, 하늘과 땅의 창조주에 대하여 언급하였을 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 중심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것을 두번째 항목에 의하여 해석하지 않고서는 첫번째 항목을 도저히 진정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두번째 항목은 단순히 첫번째 항목을 따르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세번째 항목에 앞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두 항목이 밝혀지게 되는 빛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 신앙고백이 오늘날 우리가 단순히 두번째 항목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만을 포함하였던, 보다 짧은 그리고 실제로 어쩌면 아주 간단한 원시적인 형태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원래의 기독교 신앙고백은 단지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첫번째 항목과 세번째 항목이 거기에 첨가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세 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졌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독단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두번째 항목이 전체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또한 실질적으로도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의 이 핵심으로부터 시작할 때에,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모든 것은 확대된 진술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추상적이고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를 원했을 때 그들은 심지어 굉장한 존경 속에서 이 지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언급하려고 하였을 때에도 언제나 헤매고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이 세번째 항목의 신학으로, 즉 성령이 신학으로, 그리고 첫번째 항목에서의 지고하신 하나님의 신학에 반대되는 경험의 신학으로, 밀고 나아가려고 하였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그 때에도 역시 그들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슐라이어마허에게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현대 신학의 전부는 17세기와 18세기의 어떤 발전들에 의하여 준비된 신학으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번째 항목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무엇을 의도하셨는지를 선언하는 두번째 항목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성하지 않은 채, 오직 성령에 대해서만 모험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세번째 항목의 일방적인 신학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고 오직 그 분에게서 시작할 때에, 우리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강력한 관계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는 것, 즉 그것을 단순히 다시금 반복하여 진정으로 놀라면서 단순히 지적할 수만 있을 뿐이고,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큰 오류의 위험 속에 빠질 수도 있는, 신. 인(God and man)을 알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 말로써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적절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우리의 고백에 의하여 선언될 수만 있을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창조와 존재의 현실 사이에 있는 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구원과 하나님에 대하여 - 이것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진리로부터는 결코 이해될 수 없으며, 종교사의 현실로부터도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예수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관계로부터만 배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 위에 계시는 하나님'(첫번째 항목)과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세번째 항목)이 의미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항목이, 즉 기독론이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의 시금석이며, 모든 신학의 시금석이 되는지의 이유입니다. "당신의 기독론이 어떤 것인지 나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줄 것입니다." 이것은 방법들이 갈라지는 지점이고, 신학과 철학 사이의 관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들에 대한 지식의 관계와, 계시와 이성이 관계와, 복음과 율법의 관계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람의 진리의 관계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신학과 정치학의 관계가 확정되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분명하거나 불분명하게, 밝거나 어둡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이 여러분들에게 아무리 높고 신비하고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또한 이것은 단순히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아주 바르고, 아주 순진하게 되는 곳이라고 또한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 중심에서, 조직신학 교수로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외쳐야 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이것이 그 지점입니다! 지식이 아니면, 가장 우매한 일입니다!" - 여기에서 나는 단순히 네살박이가 실제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말할 것을 갖고서, 아이들과 대면하고 있는 주일학교의 교사와 같이 여러분들 앞에 서 있습니다. "세계는 상실되었지만,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으니 기뻐하라. 오 기독교계여!" "세계는 상실되었지만,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으니 기뻐하라. 오 기독교계여!"
이 중심은 행동의 말씀이거나 혹은 말씀의 행동입니다. 나는 기독교 신앙의 이 중심에서, 우리 사이에서 그렇게 유행하고 있는 말씀과 행위 사이와, 아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사이의 전체적인 대조가 어떤 의미를 갖기를 그만두게 된다는 사실이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되기를 심히 원하고 있습니다.
머리말
제1장 과제
제2장 신뢰로서의 신앙
제3장 지식으로서의 신앙
제4장 고백으로서의 신앙
제5장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
제6장 아버지 하나님
제7장 전능하신 하나님
제8장 창조주 하나님
제9장 하늘과 땅
제10장 예수 그리스도
제11장 구세주와 하나님의 종
제12장 하나님의 외아들
제13장 우리 주님
제14장 성탄절의 신비와 기적
제15장 고난을 받으사
제16장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제17장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제18장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제19장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제20장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제21장 내가 성령을 믿사오니
제22장 교회와 그것의 단일성과 거룩성과 보편성
제23장 죄의 용서
제24장 몸의 부활과 영원한 삶
칼 바르트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 태생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베른, 베를린, 튀빙엔 등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배우고, 제네바의 개혁파 교회의 부목사로 2년, 자펜빌 교회의 목사로 10년간 사역하였다. 이 동안 종교적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였고, 1919년에는 신학계를 온통 뒤흔들다시피 한 저서 <로마서 주해>를 출간하였다. 그후 괴팅엔 대학, 뮌스터 대학, 본 대학 등에서 교수를 지내며 당대 최고의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괴팅엔 대학과 뮌스터 대학 교수 시절 그는 투르나이젠과 고가르텐 같은 동료 신학자들과 함께 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고 이때부터 변증법적 신학자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나치에 의하여 발행이 중단되었는데 후에 바르트는 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히틀러와의 투쟁을 계속하였고, 1934년에는 그 유명한 ‘바르맨 신학선언’을 작성하여 발표함으로써 본 대학 교수직에서 해직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스위스로 돌아와 바젤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평생을 교회교의학 집필에 시간을 바쳤고 1968년 12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미완성으로 끝난 총 12권 전집의 <교회교의학>과 <로마서주해>외에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