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이 책은 몇 가지 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1.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하기”의 일반화가 가능할 것인가?(출판사 서평 참조)
2. 주님의 재림과 부활은, 구속사의 역사 전체로 보면,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지 2천 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죽은 뒤에 바로 연결되는 일이라고 본다. 중간 상태라고 하는 천국(천당)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항상 죽은 자를 잔다고 표현하며,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하고, 또 영의 세계에는 공간이 없으므로 따라서 시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이란, 시간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 없는 상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천당)에서는 2천 년 전에 죽은 자나 어제 죽은 자나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이 세대 중에 오실 것처럼 말씀하시고 바울과 베드로 등 제자들도 그렇게 말했지만 아직도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는 모순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3. 주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의 부활을 말할 때에 긴 시간과 여러 과정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그리고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는 어떤 중간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죽은 자들이 일시에 부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우주 질서와 물리 법칙이 새로운 우주 질서와 물리 법칙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므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두 단계 재림(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도, 기존의 휴거 개념도, 천년 왕국도, 사탄의 묶임과 놓임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7년 대환란은 성도들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고 휴거는 그 두려움을 상쇄시킨다. 천년 왕국은 주님의 재림을, 종말론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 요식 행위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그 자체로 구속사의 완성이다! 휴거로 말세의 환란을 면할 수 있다고 유혹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4. 천년 왕국과 사탄의 묶임을 신학적으로 완전히 증명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탄의 묶임이 주님의 초림과 관련이 있다면, 그 이전과 이후로, 사탄의 역사에서 어떤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땅에 불을 내려오게 하는 사탄의 역사(계 13: 13)와 엘리야의 사례(왕상 18: 16~40)를 비교함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사탄의 역사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5. 부활 신앙의 상실로 인하여 어딘가 허전해진 기독교의 가르침들이, 부활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다시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헌신과 양보와 용서와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당하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되면, 초대 교회 때와 같은 신앙의 열정과 역동을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하여 또한 지금과 같이 개인적 경건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성화의 목록을, 이타적인 희생과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차원으로 갱신할 필요가 있다.
6. 부활 신앙의 회복은 지금까지의 성경 해석, 교리와 가르침, 사역의 방향성,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실천 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보강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말과 논리로는 설득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부활 신앙의 확립과 회복은 설교와 QT 등에서 특히 힘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부활은 영적인 것도 내면적인 것도 아니고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구원의 현실이다.
[출판사 서평]제목과 달리 이 책은 가장 먼저 “아버지의 마음”(고전 4: 14~16; 살전 2: 7~8)으로 기도하기를 제시한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기도이다.
이제 우리 주님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하오니
차라리 저의 생명을 대신 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영혼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차라리 이 사람의 병을 저의 몸에 옮기시고 이 영혼을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고 이렇게까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부활 신앙을 회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음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히 2: 15)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종교가, 살아서 자기 종교에 충성하고 선을 행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이른바 천당 신앙은 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활 신앙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믿음이다. 불교의 극락과 힌두교의 ‘스와르그’, 이슬람의 ‘잔나’ 등은 모두 조금씩 다르긴 해도 공통적으로, 평화와 행복과 만족으로 가득한 세상(육신적인 색채가 강하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부활 신앙은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육체로써 살아 가는 구체적인 현실(영적인 관념이 아니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의 천국(천당) 신앙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으며, 부활 신앙을 대체할 수도 없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부활 신앙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주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다. 성경에서 주님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묶여 있는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곧 다시 오실 것처럼 말씀하셨고, 제자들 역시 그렇게 알아들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세대에 (어쩌면 자신의 생애 중에) 다시 오실 것으로 기대했다. “항상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등은 모두 부활과 관련해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일단 우리는, 이 육신의 세상과 저 죽은 자들의 세상은, 시간의 흐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죽은 사람을 잠잔다고 표현한다. 베드로후서와 시편에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했다. 그리고 천국(천당)에는 공간이 없으므로 따라서 시간도 없다. 이런 점들을 깊이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고 나면, 주님 재림과 부활의 때까지 (천국=천당에서) 오래 기다려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3일 쯤) 긴 잠을 자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깨어나게 될 것이다. 2천 년 동안이나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그저 자기 생애 만큼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초과되는 기간은 천국(천당)에서 잠자듯 안식을 누릴 따름이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의 부활을 말할 때에, 긴 시간과 여러 과정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 주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그리고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는 어떤 중간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죽은 자들이 일시에 부활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우주 질서와 물리 법칙이 새로운 우주 질서와 물리 법칙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므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두 단계 재림(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도, 기존의 휴거 개념도, 천년 왕국도, 사탄의 묶임과 놓임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지금 이른 바 성화의 목록을 보면 개인적 경건의 차원에 너무 치중되어 있는데, 이제 새롭게 이타적인 희생과 헌신의 차원으로 갱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