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평화의 종착지다존 폴 레더락은 평화학자이자 갈등전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국제분쟁 조정가다. 니카라과, 소말리아, 북아일랜드, 콜롬비아, 네팔, 필리핀 등 전쟁으로 피폐한 곳에서 반정부 단체와 정부 최고위급 관료들의 자문에 응하며 평화 세우기에 매진해 왔다. 그는 평화가 상상력과 언어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25개국의 갈등과 분쟁 현장에서 참된 화해를 추구하며 살았다.
전쟁과 갈등으로 신음하는 지구촌 곳곳에서 평화를 추구하기란 쉽지 않다. 민족국가의 분열에서부터 종교 갈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은 내면의 평화를 좀먹는 일이기도 하다. 지극히 어렵고, 고통스럽고, 종종 폭력적이기까지 한 상황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레더락은 ‘화해’야말로 평화의 궁극적 종착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등의 현장에서 우리는 자신을 상대와 분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며, 상대방을 비인간화함으로써 쉽게 원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투사와 부정적인 판단은 이웃을 원수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갈등 상황에서 우리는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려 애쓴다. 분쟁 상황에서는 모두가 자기 쪽에 정의와 진실이 있다고 여긴다. 이 때문에 갈등이 한창인 상황에서 진실, 자비, 정의, 평화를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모순적인 힘으로 여긴다. 그들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더락은 성경을 깊이 통찰하면서 각각의 힘이 한데 어우러질 때 참된 회복의 공간이 마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화해가 곧 복음이다예수는 화해의 본보기다. 예수의 아주 친한 친구였던 제자들은 불순한 자, 원수, 불경한 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낯설었기에 그런 이들로부터 예수를 보호하려고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제자들은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누구는 들여야 하고 누구는 들여선 안 되는지 관여하는 문지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더러운 사람이나 병자들과는 접촉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신앙의 적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반면 예수는 어느 경우에나 정반대로 행동했다. 예수는 사람들을 보면 발길을 멈추고, 주목했으며, 마음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들을 어루만지고, 옆에서 함께 걸으며, 그들의 집으로 갔다. 예수의 행적은 화해의 궁극적인 본보기다. 가장 낮은 자들을 주목하고, 함께 머물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예수의 모습으로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 곁에 집을 지으셔서 우리가 함께 걷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교류하게 하신다. 예수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화해하는 사랑이 실재함을 본다. 화해는 복음의 핵심이자 하나님의 사명이 세상에 드러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찢어진 것을 꿰매고 치유하려고 우리를 향해 나아오신다.
화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고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다. 화해는 갈등으로 향하고 갈등을 헤쳐 나가는 여정이다. 레더락은 만물이 화합하는 화해의 꿈을 실현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우리는 갈등, 폭력, 전쟁이 만연한 현실에 발을 딛고서 진실, 자비, 정의, 평화가 어우러지는 참된 회복을 바라는 꿈과 이상을 품고 살야가야 한다.
《화해》는 레더락이 걸어온 길을 함께 걸어 보자는 초대장이다. 여기에는 화해의 여정을 걸어간 사람들의 삶이 들어 있다. 자신을 포함하여 사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긴장, 갈등, 위협, 폭력의 민낯은 물론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 관계의 위태로움, 평화의 취약성, 보장되지 않은 화해의 절박함을 세세히 들여다보도록 초청한다.
《화해》는 용서와 화해의 나침반과 지도가 들어 있는 여행 안내서이기도 하다. 독자가 원한다면 개인, 공동체, 지역사회, 국가라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은 물론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뿌리내린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직면하고 해결하는 다양한 경로를 안내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