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르세르는 칼빈의 모국(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칼빈 주의의 대표자였다고 일반적으로 인정된다'고 앙드레 쉴레머(프랑스 칼빈학회 부회장)는 말한다. 미국 조직신학자 존 머레이는 르세르의 「개혁교의학 서론」이 출판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르세르의 문제 파악능력... 그가 갖춘 박식함이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르세르(Lecerf)를 20세기의 대표적 개혁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제1부 "종교적 지식의 본질"에서 저자는 종교적 지식은 실제 대상의 진정한 지식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믿음만이 이 지식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예를 만들고 있다.
제2부 "종교적 지식의 토대와 명세"에서, 저자는 종교적 지식의 교의적 공식화는 유신론적, 기독교적, 개신교적, 그리고 칼빈주의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 188~192쪽 '제11장 종교, 마술, 그리고 과학'중에서]
마술과 과학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지식으로 스스로를 나타낸다. 마술은 우리의 사회학자들이 설명하고 표명해 왔고, 또한 그들이 대상과 신호의 일치의 법칙들이라고 부르는, 이를테면 유유상종의 법칙들을 상기시켜 주고, 접촉을 통하여 특성들을 전달하며, 또한 말과 신조들의 효력에 관한 법칙들이라고 부르는 어떤 원리들에 대한 지지에 의존하고 있다. 마술의 관습은 이것들이나 혹은 이와 유사한 원리들에 대한 적어도 맹목적인 지지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들이 실재를 다스리는 것으로 가정된다. 기본적으로, 마술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사물들과 사건들을 다소간 완전한 방식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다량의 정보로 이해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원리들은 성급한 일반화들과 우연한 혹은 습관적인 관념 연합들을 통해서 전개되는 인간 정신의 자발적인 활동의 산물이다. 요컨대, 마술은 부정확하게 구성된 과학이다. 이것은 실제적인 구분들과 자연적인 인과관계의 법칙이 아무런 기초지식론적인(gnosiological)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유명론과 범신론이다. 이것은 레비-브륄이 고안하였던 "전(前)논리적인"(prelogical)이라는 용어보다는 알리에(Allier)더불어 우리가 "위추리적인"(paralogica)이라는 형용사로 써 묘사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실제로 "미개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논리적이며, 어린아이처럼 떠들썩하게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지식은 실험적인 논리의 원리가 아닌 다른 원리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리적으로 통일된 기본적인 유대, 즉 실재를 통합하는 원리의 통일성과, 마술적인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는 실재의 질서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원리가 어떤 야만적인 종족들 사이에서 충분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베이컨(Bacon)이 설정한 논리의 법칙들을 의식적으로 따른다. 의심할 바 없이, 과학자는 경험론과 범신론과 같은 퇴보적인 경향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간에 실제로는 이성의 법칙들과 지배적인 원리들을 질서정연하게 적용한다. 비록 실제로는 확고하고 일정한 어떤 결과들로 환원되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인과적 결과는 자연 법칙들의 원리로 남아 있다. 실험을 통하여 현상들 사이에 있는 일정한 관계들을 발견하는 것은 과학자의 앞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목표 그 자체이며, 그의 원시적인 목표는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그의 목표는, 수단과 목표들이 다르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마술사의 그것과 동일하다. "미개한" 종족들의 기술적인 과정들은 종종 매우 독창적이며, 또한 관찰과 인내와 기민함의 주목할만한 특성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술적인 관습들과 침범할 수 없는 전통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침체될 운명에 처해 있다. 개화된 사람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과정들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들 사이에서의 관계들의 법칙 이외에 다른 어떤 법칙을 알지 못하는 과학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정되어지기 때문에, 부단히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마술과 과학은 원리들과 방법들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실재의 질서에 대한 그것들의 일반적인 전제에 있어서, 그리고 그 양자가 추구하는 목표, 즉 사물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법칙들을 따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가장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과학들은 공리적인 기술로부터 비롯되고 또한 그것을 산출한다. 이것들은 실제적인 필요성 속에서 산출되며, 또한 이런 필요성 사이에서 그것들의 가장 효력있는 한 가지 자극제를 발견한다.
마술 역시 같은 필요들을 만족시킬 것을 약속한다. 심지어 종교에 대하여 가장 무관심한 사람조차도, 이런 필요들에 대하여 반드시 무관심하지는 않으며, 금욕적인 의미에서 포기를 지지하고, 소위 죽음의 욕구를 갖는 태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이것은 종교가 그 자체로서, 과학의 과정들과 경쟁하는 기술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심지어 예를 들어 기독교와 같이, 인간의 현세적인 필요들에 관계하는 그런 종교들조차도, 이런 필요들의 만족을 보증하는데 필요한 기술적인 수단을 그에게 가르칠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오히려 예배자가 신(神)과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데, 자신의 시대의 과학과 환경에 의해 제안된 수단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일이 이 신(神)의 자비로운 도움에 의해 장려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마나(mana)나 혹은 초인간적인 은혜와 같은 가치있는 본질을 그에게 수여함으로써, 주체에게 주로 작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종교에 관한 한, 현상들이 유사성의 법칙에 의해서 다스려지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법칙에 의해서 다스려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만약 이것들이 유사성의 법칙에 의하여 다스려진다면, 소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그 법칙을 따르는 것, 즉 사냥의 성공을 담보하기 위하여 화살이 꽂혀 있는 암사슴을 묘사하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본질에 있어서, 이러한 개념들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마술적인 관념들의 지배가 계시 종교에 있어서 제의들과 성례들에 대한 해석을 변경시키고, 또한 마술적인 개념들과 의식들을 다른 것들 속으로 도입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상정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이런 요소들의 도입이나 보존에 적응할 수 있으며, 그것을 종교들의 위계 구조의 거의 정점에 두게 만드는 고등한 정신성의 특성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서 자신의 성례전 교리를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루터교가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마술은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종교적이지도 반종교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더 악한 것뿐만 아니라 더 선한, 모든 원인들에 의하여 마음대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 우리가 물리적인 사실들과 관련하여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의 성례 의식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으로부터 이것을 주의깊게 배제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거룩한 문서들에서 아무런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접촉의 법칙과 같은 그것의 어떤 법칙들이, 초물리적인 영역에서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인정하는 권위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면, 우리는 루터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입장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합리주의적인 정신성과 자연적인 인과 관계의 이름 속에서, 성례전에 대한 순전히 상징적인 개념을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나타내는 불가시적인 은총을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상징으로써 표시하고 제안하며 보증하시는지의 여부를 인식하는 문제에 대하여 자연과학들과 합리주의적인 정신성은 전혀 판단할 능력이 없다. 정신적인 기능들은 경험주의나 합리주의 차림새를 취하지 않는다.
즉 이것들은 실재론의 영역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때때로, 종교의 계시는 자연 과학들이 그것들 자체의 방법들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오직 사실들에 대한 추론과 관찰 위에 그것들이 정초시키고 있는 주제들을 논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례들의 보기들은 창조와, 인간의 종의 단일성, 그리고 도덕적 자유에 관한 교리들이다. 실제로, 신학적 우주론이 있고 신학적 인간학도 있다. 그러나 세계와 인간은 과학적인 호기심을 만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신적인 주권에 이것들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구원의 조건들의 시각에서만 그 교리들 속에서 연구된다.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계시된 천문학이나 기하학이나 지질학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이런 학문들은 사실상, 종교적인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다루는 방법들과 알고 있는 사실들의 도움을 받아서, 과학자가 자기의 결론들이 신학자들의 해석과 그 순간에 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런 이유로 인하여 그가 걱정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가 신자이거나 혹은 현대적인 개념들에 대해서 단순히 잘 알고 있다면, 그는 과학의 이론들이 불변의 교리들이거나 혹은 "의심할 나위 없는" 확실한 것들이 아니라, 단순히 일시적으로 작용하는 가설들에 불과하며, 신학적인 해석들도 역시 정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각자가 자신들의 과제를 추구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시간이 사람들의 오류를 고쳐줄 것이다. 신학자는 거룩한 본문들에 대한 해석을 그 시대의 과학 이론들에 서둘러 전용할 필요가 없다. 후자는 너무나 빨리 낡은 것이 되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지속된다."